[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제20화] '궁녀'

2020-06-25 오후 1:31:55

순금이는 이빨을 꼭 깨물고 실눈을 떠서 새벽에 들어와 술에 취한 채 쓰러져 자는 아버지를 째려봤다. 한평생 주색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라는 인간이 열세 살밖에 안된 제 딸을 황 참봉에게 팔기로 작정한 것이다.

 

 

순금이는 남장을 하고 어머니가 마련해준 열 닷 냥을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은 뒤 집을 나섰다. 사립문을 잡고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에게 억지로 뒤돌아 웃음을 보인 순금이는 발길을 한참 재촉하고 나서야 눈물을 쏟았다.

 

경북 풍기를 출발한 순금이는 죽령을 넘어 충북 단양 주막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부터 다시 걸었다. 걸은 지 나흘째, 날은 어두워졌는데 주막도 없어 순금이는 산골짝에 보이는 불빛을 따라가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했다. 심마니가 차려주는 감자보리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고 나서 순금이가 심마니에게 물었다.

 

"아저씨, 따님이 자는 방에 하룻밤 같이 잘 수 없나요?" 심마니가 빙긋이 웃더니 답했다. "너는 남장을 했다마는 여자가 맞구나." 그날 밤, 순금이는 혼자 사는 심마니에게 밤새도록 겁탈을 당했다. 심마니는 일합을 치르고 벌거벗은 채 머루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또 일합을 치르고 술을 마셨다.

 

새벽닭이 울 때 삼합을 치르고는 쓰러져 코를 골았다. 순금이는 아랫도리가 쓰라렸지만 울지는 않았다. 심마니의 두 손과 두 발을 묶은 후 다락을 뒤져 돈을 몽땅 훔쳤다.

 

집을 나선 지 보름 만에 한양에 다다라 동대문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꼬깃꼬깃 접어서 건네준 주소를 들고 남산골 할머니 댁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어머니의 고모로, 한평생 궁궐에서 상궁으로 지내다 다 늙은 뒤 궁궐에서 나와 홀로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대뜸 말했다. "순금아, 내가 묻는 말에 바른대로 대답해야 한다. 거짓말이 들통 나면 너도 나도 곤욕을 치른다. 숫처녀냐?" 순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 순금이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궁으로 들어갔다. 상궁 하나가 할머니를 반갑게 맞았다. 상궁이 순금이를 보더니 물었다. "보통 미모가 아니군요. 물론 금사미단(金絲未斷)이겠지요?" 할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사미단이란 숫처녀란 뜻이다. 순금이의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상궁이 들고 온 보자기를 풀자 새장 속 앵무새가 처녀가 아니야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할머니가 순금이에게 팔을 걷으라고 했다. 순금이 와들와들 떨자 할머니가 말했다. "앵무새 피가 네 팔뚝에서 흘러내리면 너는 금사미단이 아니지만, 피가 엉기면 문제가 될 게 없으니 걱정 말아라" 순금이는 새파랗게 질렸다. 상궁이 바늘로 앵무새 다리를 찌르자 피가 순금이의 팔뚝에 떨어졌다.

 

순금이가 기절했다가 깨어나니 상궁과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금사를 잘 지켰네.' 할머니는 돌아가고 순금이는 수습 나인이 됐다. 그날부터 채색교관이 순금이에게 교육을 했다. 혹시라도 임금의 눈에 띄어 합방할 때 순금이가 지켜야 할 규칙들을 가르쳤다.

 

"반드시 불을 꺼야 한다. 하명이 없으면 고쟁이를 입고 있어야 한다. 좌음우양(左陰右陽) 해야 한다. 밤일을 치를 때 눈을 떠 용안을 쳐다보면 참수형이고, 소리를 내서도 안 되며, 임금 몸에 손을 대서도 안 된다."

 

수습 나인에서 나인이 되는 데 5년이 흘렀다. 채색교관으로부터 받은 교육을 다 잊어버리도록 임금은 한 번도 순금이를 찾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잠이 안 와 뒤척이고 있는데 순금이보다 열두 살 많은 상궁 하나가 방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함께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순금이가 물었다. "언제 임금님이 제 방에 들어올까요?" 상궁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킥킥 웃더니 답했다. "나도 왕궁에 들어온 지 십오 년이 넘었지만 임금님 코빼기도 못 봤어." 그날 밤 임금 양물이 들어와야 할 순금이의 그곳에 상궁의 목신이 들락날락거렸다.

 

궁녀는 한번 왕궁에 들어오면 절대로 나갈 수가 없다. 폭삭 늙고 병이 들어야만 출궁궁녀가 돼 궁말(궁을 나선 궁녀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열아홉 살이 된 순금이가 밤마다 목신으로 뜨거운 몸을 달랠 때 이상하게도 심마니 얼굴이 떠올랐다.

 

어느 날 순금이는 기르던 고양이를 목 졸라 죽이고 목을 따 피를 한 사발 받아둔 뒤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고양이를 파묻어버렸다. 고양이 피를 마신 순금이는 방바닥에 피를 뿌리고는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나인과 상궁이 모이고 제조상궁이 왔다.

 

순금이가 쓰던 옷과 이불을 모두 불사르고 순금이가 묵던 방은 3일 동안 쑥 연기로 소독했다. 폐병에 걸린 순금이는 왕궁에서 쫓겨났다. 순금이가 찾아간 곳은 치악산 노총각 심마니였다.

 

조주청(45년생) 작가는 안동시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 안동에서 호텔을 운영하다가 1981년 조선일보의 레저잡지 월간 산에 독자만화 투고를 통해 만화가로 데뷔하였습니다. 풍자적이고 익살스런 그림체가 인상적이며 월간조선에 경제만평을 연재.

 

 

정차모 기자 (jcm54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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